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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1923 – 은폐된 역사를 스크린 위로 불러내다

by douoo_oo 2025. 9. 9.

<September 1923>는 일본의 신예 감독 야마모토 아유미(Yamamoto Ayumi) 가 연출한 장편 영화로, 2023년 부산국제영화제(BIFF)에서 뉴 커런츠상을 수상하며 국제적 주목을 받았습니다. 작품은 1923년 9월 간토 대지진 직후 일본 사회에서 발생한 조선인 학살 사건을 정면으로 다룹니다. 오랫동안 일본 사회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던 역사적 비극을 젊은 감독의 시선으로 재현한 이 영화는, 단순한 역사극을 넘어 오늘날 차별과 혐오, 집단적 폭력의 구조를 되묻는 작품으로 평가됩니다.

사건의 배경 – 1923년 9월 간토 대지진과 조선인 학살

1923년 9월 1일, 규모 7.9의 간토 대지진이 도쿄와 요코하마를 강타했습니다. 수십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대참사 속에서, ‘조선인이 방화를 하고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유언비어가 순식간에 퍼졌습니다. 이 소문은 경찰과 군 당국의 묵인 속에서 민간 자警단의 폭력으로 이어졌고, 수천 명의 조선인과 일부 중국인, 그리고 일본인 사회주의자와 지식인들이 학살당했습니다.

 

일본 현대사에서 이 사건은 국가 권력과 사회적 혐오가 결합해 발생한 집단 폭력의 대표적 사례로 꼽힙니다. 그러나 일본 사회에서는 오랫동안 침묵 속에 묻혀 있었고, 교과서나 대중 문화에서도 거의 다뤄지지 않았습니다. <September 1923>는 바로 이 금기된 역사를 스크린 위로 불러내며, 침묵의 장막을 찢어낸 작품입니다.

줄거리와 전개 – 평범한 사람들의 시선에서 본 학살

영화는 거대한 재난의 스펙터클이나 정치적 담론보다, 평범한 사람들의 시선을 통해 사건을 재구성합니다. 도쿄 근교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조선인 이주 노동자 가족과 일본인 이웃들이 교차하며 등장합니다.

  • 대지진 이후, 마을은 공포와 불안으로 가득합니다.
  • 유언비어가 퍼지자, 주민들 사이에 긴장이 고조됩니다.
  • 일본인 주민 일부는 조선인 이웃을 보호하려 하지만, 다수는 불안과 증오에 휩싸여 폭력에 가담합니다.
  • 주인공 격인 한 일본인 청년은 이웃 조선인 가족과의 우정을 지키려 하지만, 집단의 압력과 개인적 두려움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이러한 구성을 통해 영화는 폭력의 발생 과정을 미시적으로 추적합니다. ‘누가 칼을 들었는가’보다 ‘왜 그 칼을 들게 되었는가’를 질문하며, 집단적 폭력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드러냅니다.

연출의 특징 – 절제와 응시

야마모토 아유미 감독은 자극적인 연출을 배제합니다. 대규모 군중이나 피비린내 나는 학살 장면 대신, 긴 침묵과 응시, 그리고 작은 표정의 변화를 포착합니다.

  • 카메라는 종종 멀찍이 떨어져 마을 사람들의 움직임을 보여줍니다. 이는 개인의 고통보다는 집단의 분위기를 드러내는 효과를 냅니다.
  • 폭력의 순간은 직접적으로 묘사되지 않고, 들려오는 소리나 멀리서 흔들리는 불빛으로 표현됩니다. 관객은 오히려 보이지 않는 폭력의 공포 속으로 더 깊이 빠져듭니다.
  • 인물들의 대사는 많지 않습니다. 대신 정적 속에서 인물들의 얼굴, 떨리는 손, 서로를 피하는 시선이 말보다 강렬한 증언이 됩니다.

이러한 연출은 사실성을 넘어선 윤리적 태도이기도 합니다. 학살의 고통을 소비적인 스펙터클로 재현하지 않고, 관객으로 하여금 침묵 속에서 역사의 무게를 체감하게 만듭니다.

영화가 던지는 질문 – 혐오와 폭력의 구조

<September 1923>는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현재를 향한 질문입니다.

  • 왜 사람들은 근거 없는 소문을 믿었는가?
  • 왜 이웃이 하루아침에 적이 되었는가?
  • 왜 국가 권력은 폭력을 방관하거나 조장했는가?

이 질문들은 100년 전 사건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에서 여전히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 가짜 뉴스와 선동이 폭력을 낳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관객에게 불편한 거울을 들이밀며, “당신은 그때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 것인가?”라는 물음을 던집니다.

배우들의 연기 – 절제된 리얼리즘

영화의 배우들은 대부분 신인에 가까운 얼굴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연기는 영화의 사실성과 몰입감을 크게 높입니다.

  • 조선인 가족 역 배우들은 억울함과 공포를 과장하지 않고, 담담하게 표현합니다. 이는 오히려 더 큰 울림을 줍니다.
  • 일본인 주민들은 서로 다른 태도를 보이며, 인간이 얼마나 쉽게 불안과 증오에 흔들리는지를 현실적으로 드러냅니다.
  • 특히 주인공 청년 역은 양심과 집단의 압력 사이에서 흔들리는 내적 갈등을 섬세하게 보여주며,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의 수상 의미

<September 1923>가 부산국제영화제 뉴 커런츠상을 수상한 것은 단순히 작품성 때문만이 아닙니다. 이 영화는 아시아 영화가 어떻게 은폐된 역사를 복원하고, 현재적 질문을 던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례였습니다.

 

심사위원단은 이 작품을 “금기된 역사에 용기 있게 다가가며, 절제된 연출로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한 작품”으로 평가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일본 영화계의 성취가 아니라, 아시아 영화 전반의 성숙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결론 – 침묵을 깨고 기억을 잇는 영화

<September 1923>는 단순한 역사극이 아닙니다. 이는 100년 전 사건을 복원하는 동시에, 오늘의 사회를 성찰하게 하는 거울입니다. 영화는 화려한 서사나 감정의 폭발 대신, 침묵과 절제를 통해 역사의 무게를 관객에게 직접 느끼게 합니다.

 

야마모토 아유미 감독은 첫 장편에서 이미 역사와 현재를 잇는 영화적 언어를 구축했습니다. 그의 시선은 단순히 과거를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해야 할 목소리를 되살리고, 미래를 향한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September 1923>를 본 관객은 결코 편안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불편함이, 우리가 이 영화를 봐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 작품은 잊혀진 이름들을 불러내고, 침묵 속에 묻힌 기억을 오늘로 이어주며, 영화가 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역할을 보여줍니다.